[신년특집]스승-상좌 4代 화합승가 구현 - 부산 옥련선원을 찾아가다
  2017-01-03 20:38 731
“몽둥이 경책 100방 맞아도 우리 노스님 최고라예”

열네살에 출가한 현진 노스님

옥련선원 복원하며 ‘백산호랑이’

제자들 엄하게 키우기로 ‘유명’

1986년 옥련유치원 개원하면서

상좌 일오스님 유치원포교 매진

260명 전원생활 새싹포교 ‘모범’

부산 옥련선원에는 현진 노스님(가운데, 옥련선원 회주)부터 노스님 상좌 일오스님(노스님 오른쪽, 옥련선원 주지), 일오스님 상좌 서목스님(일오스님 옆, 옥련선원 총무) 등이 오순도순 살아가고 있다. 서목스님의 사촌상좌격인 도겸스님(맨 왼쪽)까지 합쳐 사실상 4대 승가가 함께 살면서 화합정진하고 있다.

“오늘 법당청소 누가 했느냐! 이놈 행자놈! 오늘 날 한번 잡아보자!” 이른 아침 샛바람부터 부산의 ‘백산(白山) 호랑이’ 현진 노스님 불호령이 떨어졌다. 갓 출가한 손상좌 서목행자는 사시나무 떨 듯 발발 떨면서 법당 뒷켠서 조마조마한 가슴을 쓸어내린다. “여기 숨었구만! 이것이 뭐가 되려고 가르쳐도 그 때 뿐인고!” 노스님 손에 든 몽둥이가 행자를 향해 떨어지는 찰라, 어디선가 달려온 일오스님이 몸을 던져 방어에 성공했다. “서목아, 빨라 도망치라!” 일오스님은 노스님의 상좌이자, 서목행자의 은사다. 노스님의 ‘몽둥이 경책’은 한번 휘두르면 100대가 넘는다. “내는 경책으로 많이도 맞았다 아이가. 니는 내 새끼니께 내가 막아줘야 안캔나. 그라니까 니는 제발 정신 좀 차리고 살라 마.” 벌써 20여년이 지난 이야기다. 

그때만도 노스님은 세수로 환갑이 갓 넘어 ‘펄펄 날아다녔고’, 일오스님 역시 잠자는 시간만 빼면 오로지 기도하고 유치원 포교하는 일밖에 몰랐던 30대 파릇파릇한 수행자였다. 날이면 날마다 노스님 눈 피해 도망치며 행자시절을 보냈던 서목스님은 말해 무엇하리, 여대생 습기를 아직 벗어내지 못한 20대 풋풋한 철부지였다. 

“중노릇 잘 못할까 싶어서 그랬지.” 말로 해도 될 것을 왜 그토록 제자들에게 몽둥이 경책을 내렸는가 물었더니 돌아온 노스님 대답이다. 여든이 훌쩍 넘은 현진 노스님은 왕년에 제자들과 신도들간에 ‘백산 호랑이’라 불렸다고 했더니, 그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제 늙었어.” 작은 체구에 손발은 아기처럼 조그맣지만 다부진 힘이 여전히 살아있다. “요즘 늙은 사람 보고 사는 중 없잖아. 고마울 뿐이지.” 호랑이처럼 크고 밝은 노스님 눈가에 작은 이슬이 맺혔다. 

현진스님은 열네살 때 절집에 들어왔다. “일제강점기 꽃다운 처녀가 결혼 않으면 무조건 위안부로 끌려갔지. 젊은 사내들도 죄다 전쟁터로 착출돼서 시집을 가려해도 나이 많고 병든 노인한테 가야 했어. 그래 출가를 발심했지. 밤마다 부처님 탁자 밑에 밀초를 켜놓고 해방되길 기도했어. 급기야 해방이 됐고 마침내 온전하게 스님이 되었제.” 옥련선원에 첫발을 댔던 1960년대 초반 만해도 선원은커녕 집도 땅도 토굴 하나도 없었다. 한평 남짓 임시법당을 겨우 만들어 도량불사 원력을 세웠다. 50여년만에 현재 옥련선원은 1만5000평이 넘는 도량규모를 자랑한다. 

“옥련선원이 있는 백산은 임진왜란 때 좌수영의 보루로 국난에 힘이 됐고 근세 들어와 금봉 혜월선사 등 고승들이 토굴정진했고….” 

“또또또…. 노시님 그만 하이소. 기자님 지루하다 아입니까.” 서목스님은 이제 노스님에게 사랑받는 손주다. 노스님 법문을 줄줄 꾀고 있고 말씀중에 물이 필요한지, 뜨끈한 차가 좋은지도 척척 알아챈다. 이번엔 곁에 있던 일오스님이 한마디 한다. 

“우리 스님은 그 많은 상좌들 다 공부시키고 집(寺) 지어주고 다 주셨다 아입니까. 옥련선원은 돌 하나 나무둥지 하나 모두 우리 스님 손으로 지어진 거예요. 7~8m 높이 축대도 마음에 안들면 다시 쌓았어예. 불사를 하면 도량에 제일 먼저 나와 계시고, 인부들이 다 가고 난 한밤중에도 홀로 남아 점검하고 또 점검하셨습니다. 우리가 다 알지 누가 알아예….” 

1992년 봉행된 옥련선원 미륵대불 봉불점안법회는 현진스님 특유의 추진력과 인간관계가 총집결한 행사로 옥련선원의 새로운 출발점이다. 당시 종정 성철스님과 서암스님 증명으로 의현스님 진제스님 고봉스님 정관스님 등이 동참했고 국회의원 경찰청장은 물론 국회의장까지 직접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현진스님은 당시 횡행했던 사회 각계 종교편향을 문제삼으면서 불교의 사회화와 대중화를 향해 거침없는 발언을 쏟아내기도 했다. 지금도 현진스님의 방에는 그 당시 참가내빈과 함께 찍은 빛바랜 기념사진이 걸려 있다.

현진스님 안중엔 옥련선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군법사가 없던 시절부터 군법당 불사에 기여하면서 군포교에 일익했다. ‘낮에는 군법당 밤에는 옥련선원’이란 말이 나돌 정도로 포교와 불사에 여념이 없었다. 덕분에 강원도 화천부터 경남 창원까지 전국에 11채의 군법당이 생겼다. 최근에 조성된 논산훈련소 호국연무사에도 적잖은 힘을 보탰다. 일제강점기 삭발염의한 현진스님의 삶에 ‘호국불교’는 간과할 수 없는 화두였다. 

부산 옥련선원의 상징은 누가 뭐래도 ‘옥련유치원’이다. 현진스님은 옥련선원 터를 잡을 때부터 교육포교를 염두에 두었다. 상좌 일오스님이 동학사승가대학을 졸업하자, 기다렸다는 듯 옥련유치원을 문열었다. 그 때가 1986년, 불교유치원이 드문 시절이었다. 마산 정법사나 부산 내원정사에 부속된 유치원이 전부였다. 

“말도 마이소, 우리 스님이 강원 화엄반 때부터 방학마다 저를 붙잡아 두고 유치원 포교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아입니까. 처음엔 은사 스님에 이끌려 했지만 유아교육시설 제대로 한번 운영해보자는 원력을 세웠지예.” 일오스님은 광주대 유아교육학과 88학번 늦깎이 대학생이 되어 거의 매일 광주와 부산을 오가면서 공부에 매진했다. 유아교육학과 출신 일반 교사들이 스님을 비전문가로 대하는 인상도 만만치 않았고 이왕 유아포교에 뛰어든 바에 전문자격을 취득하기 위해서다. 

유교과 출신 비구니 스님 원장과 유아포교에 열정이 큰 든든한 노스님이 있고 인성교육은 물론 자연친화적인 프로그램을 도입하면서 옥련유치원은 부산 명문 유치원으로 승승장구했다. 개원 초기 150명 원생을 시작으로 최대 430명까지 아이들을 수용했고, 최근에서야 법적인 규제에 갇혀 260명 정원으로 운영하고 있다. 원훈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주인공이 됩시다.’ 불교적 가르침이 깃든 ‘주인공’이란 의미지만, ‘아이들이 주인’이라는 ‘아이들이 우선’이라는 뜻도 함축하고 있다. 

학부모들이 환호하는 옥련유치원은 사찰지 일부를 개장한 감자 고구마밭에서 전원(田園)생활을 하고 식단에서 육고기는 뺀다. 대신 몸에 좋은 건강식 뿐만아니라 스님이 직접 다도(茶道)를 가르친다. “부산에 의사 교수 학교 선생님 할것없이 우리 옥련 출신이 수두룩합니다. 하하하. 옥련을 잊지 않고 자기 자녀까지 데리고 오는 부모도 많고 만삭 몸으로 유치원에 찾아와 유치원 시절을 떠올리면서 태교를 하는 임신부도 있어요. 내는 다 기억은 몬하지예. 그래도 얼굴 보면 눈매가 참 낯익어요.” 

유치원 운영이 만만치는 않다. 아이들 300여명을 날마다 보육하고 교육하는 일이 어찌 쉽겠는가. 일오스님은 말한다. “그래도 옛날에는 지금처럼 힘들진 않았습니더. 지금 우리 유치원에는 36대의 CCTV가 돌아가요. 아이들이 함께 놀고 공부하다보면 싸우고 다칠 수도 있지만 요즘 부모들이 너무나 예민하셔서 아예 다치면 직행하는 성형외과까지 두고 삽니다. 아주 조금 다쳤어도 흉터가 남을까봐 염려하는 부모님들이 너무 많아서 아예 일반 병원 제쳐두고 성형외과로 가요.” 수년째 원비는 동결이다. 노스님의 뜻이다. 일오스님은 “우리가 못하면 노스님이 욕먹어예. 하루하루 작은 일 하나도 옥련의 얼굴이라 생각하고 신중하게 해나갑니다. 저는 그렇습니더. ‘내 아이’가 아니라 ‘우리 아이’라는 생각 뿐이지예.” 

총무소임을 보고 있는 서목스님은 “아직도 큰스님이 무섭다”면서도 말끝 말머리마다 ‘우리 노스님’ ‘우리 노스님’이 입버릇이다. 노스님이 그 옛날 호랑이처럼 힘이 넘쳐난다면 서목스님은 여전히 몽둥이 경책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기자가 취재일정을 잡느라 큰스님 일정부터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에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우리 노스님은예 어지간해선 출타도 안해예. 제아무리 오라코 해도 상좌집도 안갑니더. 우리 노스님은예 여기 옥련에서 하루종일 기도하고 정진하고 공양하시고 오로지 수도만 하셔예. 마 아무데도 안가신다 아이요.”

 옥련선원은…

창건 시기와 창건자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670년(문무왕 10년) 원효스님이 백산사라 이름을 정하고, 910년(성덕왕 9년)엔 고운 최치원이 이 사찰에 은둔하여 참선했다 알려진 유서깊은 고찰이다. 1635년(인조13년) 옥련암으로 개칭했고, 1976년 현진스님이 이 터에 대웅전을 중창하면서 옥련선원으로 현재까지 자리매김했다. 

1992년 50척 높이 미륵대불을 세웠고 미얀마 고승인 우의자난다 스님이 가져온 세존 진신사리 12과와 미륵 삼부경을 봉안했다. 1998년 전통사찰 제28호로 지정됐고 삼국시대의 마애미륵석불과 신라시대 불상으로 추정되는 부석불석상 등 여러 성보를 소장하고 있다. 

[불교신문3262호/2017년1월1일자] 

부산=하정은 기자  tomato77@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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